퇴계 이황(1501~1570)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입니다. 영상은 그를 「묻고 따진 조선의 학자」로 소개합니다.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나 송나라에서 건너온 공부, 곧 성리학을 평생 붙들었습니다. 기록
쉰아홉이던 1559년부터 퇴계는 서른셋의 기대승과 착한 마음과 감정의 뿌리를 두고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. 사단칠정을 두고 오간 논변은 1559~1566년 여덟 해 이어졌고(두 사람의 편지는 1570년 11월까지 계속됩니다), 그 사이 퇴계는 자기 문장을 고쳤습니다. 고치기 전 글자와 고친 글자는 지금도 문집의 「改本」에 나란히 남아 있습니다. 기록
퇴계가 끝까지 이치도 스스로 일어난다는 생각을 지켰다는 것은 학자들의 읽기입니다. 기대승은 第三書에서 퇴계의 두 구절을 「매우 정밀하다(甚精密)」고 한 뒤, 「七情則兼有 而四端則只有理發一邊」(칠정에는 이치가 일어나는 쪽도 기운이 일어나는 쪽도 있고, 사단은 이치가 일어나는 쪽뿐이다)이라며 사단과 칠정을 둘로 가르는 데 맞섰습니다. 영상 진행자는 퇴계가 지킨 것을 「뿌리」라고 읽습니다. 해석
1553년 가을에 쓴 「정재기」를 1556년에 다시 읽고 「몹시 부끄러웠다」는 뜻의 발문을 남기고 글을 고쳐 씁니다. 문집에 실린 것은 이 고쳐 쓴 「정재기」인데, 여기서 그는 고요에 잠겨 세상일을 끊는 것을 불교와 노장의 치우침이라 했습니다. 기록
1568년 음력 12월, 예순여덟의 퇴계는 열일곱 살 임금(선조)에게 『성학십도』와 차자를 올렸습니다. 병든 몸으로 직접 만드느라 눈은 어둡고 손은 떨려 글씨가 반듯하지 못하다고 적었고, 열 장의 그림은 모두 경(敬)을 중심에 둔다고 했습니다. 기록
1570년 음력 12월 8일 마지막 날 아침, 퇴계는 시중드는 사람에게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게 했다고 연보가 전합니다. 연보는 그날 한 말을 남기지 않았습니다. 기록 · 후대 편찬