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기록] 문헌으로 확인된 것 · [요지] 원문을 줄여 옮긴 것 · [전승]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· [재구성] 기록을 바탕으로 지은 장면과 대사(대사의 내용은 원문에서) · [해석] 학자들의 해석 · [논쟁 중]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것 화면 왼쪽 위의 ① 사실 · ② 해석 · ③ 제 생각은 이야기의 층위입니다.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[전승]만 표시합니다.
0:06 · 1672년, 잠긴 문
0:06내레이터1672년 8월, 네덜란드 헤이그. 이웃 나라들이 한꺼번에 쳐들어오자,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탓할 누군가를 찾았습니다.
0:14내레이터그리고 성난 군중이, 나라를 이끌던 형제를 거리에서 죽였습니다.
0:19내레이터그날 밤, 한 조용한 철학자가 벽보를 붙이러 나가려 했습니다. 쓰려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. 야만인 중의 야만인. 이런 짓을 한 너희야말로 야만인이라는 뜻이었습니다.
기록 · 라이프니츠의 메모
0:33집주인나가시면 안 됩니다. 선생님도 죽어요.
재구성 · 라이프니츠의 메모
0:36내레이터집주인은 문을 잠갔습니다. 사람의 감정을 연구한 철학자, 스피노자였습니다.
0:42진행자욱해서 보낸 메시지, 1분 뒤에 지우려는데 이미 읽음이 떠 있던 적 있으시죠?
0:47진행자욱하고 나서 늘 후회하는 이유. 오늘 그 답을, 350년 전 이 철학자에게서 찾아보겠습니다.
0:54진행자끝까지 보시면 세 가지를 가져가십니다. 역사에서는, 황금시대의 네덜란드를 뒤흔든 군중의 분노. 철학에서는,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 법.
1:04진행자과학에서는, 화가 났을 때 심장을 느리게 하는 쉬운 방법 하나.
1:17 · 스피노자는 어떤 사람이었나
1:17내레이터1632년, 네덜란드 암스테르담.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롭고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.
1:25내레이터스피노자는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유대인 상인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.
1:29내레이터그런데 23살 되던 해, 유대 공동체는 그를 영원히 내쫓았습니다. 파문입니다. 왜 그랬는지, 문서에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습니다.
풀이 · 파문 = 공동체에서 내쫓김
1:38내레이터어느 날 밤에는 누군가 휘두른 칼에 찔릴 뻔했습니다. 그는 칼자국 난 외투를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고 전합니다.
전승
1:46진행자아마 잊지 않으려고 그랬을 겁니다. 사람이 얼마나 쉽게 욱하는지를요.
1:51내레이터1673년,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교수 자리를 주겠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습니다.
1:57스피노자철학할 자유가 어디까지일지, 저는 모르겠습니다.
재구성 · 기록 · 요지 · 편지 48(1673)
2:00내레이터그는 자리를 거절했습니다. 그리고 십수 년에 걸쳐 써 온 책을 마무리했습니다. 『윤리학』. 사람의 감정을, 수학 문제 풀듯 하나하나 풀어 쓴 책입니다.
2:11스피노자사람의 감정을, 선과 면과 입체처럼 다뤄 보겠습니다.
재구성 · 기록 · 요지 · 『윤리학』 3부 서문
2:16 · 원효는 어떤 사람이었나
2:16내레이터이번엔 천 년을 거슬러, 신라로 가 보겠습니다. 617년, 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. 원효입니다.
기록 · 『삼국유사』
2:25내레이터신라와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싸우던 시대. 스님이 된 원효는, 새로운 불교를 배우러 당나라로 떠나려 했습니다.
2:33내레이터그 무렵 당나라에서는, 현장이라는 스님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들을 옮기고 있었습니다. 우리가 지금도 외는 반야심경도, 그가 옮긴 것으로 전하는 경전입니다.
2:43내레이터첫 번째 길은 고구려 땅에서 막혔습니다. 국경을 지키던 병사들이, 두 스님을 첩자로 여겨 붙잡았던 겁니다.
2:51내레이터두 번째 길에도 친구 의상이 함께였습니다. 비 오는 밤, 두 사람은 굴에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.
2:58내레이터목이 말랐던 원효는 어둠 속에서, 바가지에 고인 물을 달게 마셨습니다.
전승
3:02내레이터아침에 눈을 떠 보니, 그곳은 오래된 무덤이었고, 그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습니다.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.
전승
3:11원효어젯밤엔 그리 달더니, 오늘은 역겹구나. 물은 그대로인데, 마음이 변했을 뿐이구나.
재구성 · 전승 · 『임간록』(1107) 등
3:17내레이터원효는 그 길로 발길을 돌렸습니다. 의상은 당나라로 떠났고, 원효는 신라에 남았습니다.
3:24내레이터『삼국유사』에 따르면, 그 무렵인 무열왕 때 원효는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아들 설총을 얻었다고 합니다. 스님의 규칙을 스스로 깬 겁니다. 파계입니다.
풀이 · 파계 = 스님의 규칙을 깸
기록 · 설화 · 『삼국유사』
3:34내레이터그리고 광대들이 쓰던 큰 박을 들고, 걸림 없음, 무애라 이름 붙였습니다. 노래하고 춤추며 온 마을을 다녔습니다.
풀이 · 무애 = 어디에도 걸리지 않음
3:43진행자한 사람은 공동체에서 쫓겨났고, 한 사람은 스스로 틀을 깼습니다.
3:49 · 세 단어만 알면 된다
3:48진행자오늘 이야기는 세 단어면 충분합니다.
3:51진행자원인. 모든 일에는 앞선 이유가 있습니다. 공이 굴러가는 건, 누가 찼기 때문이죠.
풀이 · 원인 = 앞선 이유
3:58진행자마음. 같은 물도, 마음에 따라 달기도 하고 역겹기도 합니다.
풀이 · 마음 = 같은 것도 다르게 비추는 거울
4:04진행자그리고 찰나.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보다 짧은 순간입니다. 네, 방금 그 순간도 벌써 지나갔습니다.
풀이 · 찰나 = 아주 짧은 순간
4:13 · 던져진 돌
4:13내레이터1674년, 스피노자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.
4:18스피노자던져진 돌이 생각할 수 있다면, 스스로 원해서 날아간다고 믿을 겁니다.
재구성 · 기록 · 요지 · 편지 58(1674)
4:23진행자우리가 욱할 때, 우리는 던지는 사람일까요, 던져진 돌일까요?
4:32 · 생각의 대국 · 스피노자 vs 원효
4:32진행자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. 지금부터는 두 사람이 남긴 글과 전해 오는 이야기로 짠, 가상의 대화입니다.
4:43스피노자사람들은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습니다.
재구성 · 『윤리학』 2부 정리 35 주석
4:46스피노자무엇을 원하는지는 알지만, 왜 원하는지는 모르니까요.
재구성 · 『윤리학』 1부 부록
4:51진행자밤 12시에 라면이 당기는 것처럼요. 먹고 싶은 건 확실한데, 왜인지는 모르죠.
4:57원효그 물은 어젯밤엔 달았소. 아침엔 역겨웠지. 물은 한 방울도 변하지 않았는데.
재구성 · 전승 · 『임간록』(1107)
5:03원효그러니 물이 변했소, 내 마음이 변했소? 모든 것은, 마음이 짓는 것이오.
재구성 · 『송고승전』(988) · 『임간록』(1107)
5:09진행자잠깐, 우리 몸 이야기를 해 보죠. 화가 치밀면,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심장이 먼저 빨라집니다.
5:17진행자그래서 말이 먼저 나가고, 후회는 나중에 옵니다.
5:25스피노자화에도 원인이 있습니다.
재구성 · 『윤리학』 3부 서문
5:26스피노자그 원인을 또렷이 알아보는 순간, 화는 더 이상 나를 끌고 다니지 못합니다.
재구성 · 『윤리학』 5부 정리 3·6
5:32진행자화가 나면 속으로 한 번 물어보라는 거죠. 나는 지금, 무엇 때문에 화가 났지? 그 질문 하나로, 끌려가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자리로 옮겨 앉습니다.
5:43스피노자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면, 미움은 더 커집니다. 사랑으로 갚으면, 사라질 수 있습니다.
재구성 · 『윤리학』 3부 정리 43
5:49원효마음은 바다와 같소.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지만, 바닷물은 그대로요.
재구성 · 『대승기신론』 · 원효 소
5:58원효선생과 나, 다투는 두 말도 한 바다의 두 파도요. 알아보는 것도 좋지. 허나 나는 붙잡지 않소.
재구성 · 원효의 화쟁·무애
6:04원효붙잡지 않으니, 걸릴 것도 없지!
재구성 · 『삼국유사』 무애
6:07스피노자적당히 즐기는 것은, 지혜로운 사람의 일이지요.
재구성 · 『윤리학』 4부 정리 45 주석
6:11진행자여러분도 지금 해 보세요. 오른손이든 왼손이든, 하나만 들어 보세요. 고르셨나요?
6:18진행자1983년의 한 실험에서는, 사람이 손목을 움직여야지 하고 알아차리기 약 0.3초 전에, 뇌가 이미 준비를 시작했습니다. 해석은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.
기록 · 해석은 논쟁 중
6:30스피노자자유롭다는 느낌은, 착각입니다.
재구성 · 『윤리학』 2부 정리 35 주석
6:33원효착각이라 해도, 그걸 알아보는 것 또한 마음이오.
재구성 · 『대승기신론』 각·불각 · 원효 소
6:38진행자그런데 몸에는, 우리가 직접 손댈 수 있는 스위치가 하나 있습니다. 숨입니다.
6:44진행자숨을 들이쉬면 심장이 조금 빨라지고, 천천히 내쉬면 실제로 느려집니다.
풀이 · 천천히 내쉬기 = 심장의 브레이크
6:51진행자같이 해 볼까요? 운전 중이시라면, 눈은 꼭 뜨고 하세요. 4초 들이쉬고, 6초 내쉬어 보세요.
7:11 · 그 뒤의 이야기
7:11내레이터1672년, 네덜란드는 네 나라에게 한꺼번에 공격받았습니다. 사람들은 그해를 재앙의 해라고 부릅니다.
7:18내레이터그 공포와 분노 속에서,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고 보는 역사가가 많습니다.
7:25진행자한 사람의 욱함은 말 한마디로 끝나지만, 군중의 욱함은 나라를 흔듭니다.
7:30내레이터스피노자는 5년 뒤, 44살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. 『윤리학』은 그가 죽은 뒤에야 나왔고, 곧 금서가 됐습니다.
7:39내레이터괴테는 젊은 날 『윤리학』을 읽고,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았다고 훗날 썼습니다. 헤겔은, 철학을 하려면 먼저 스피노자를 거쳐야 한다고 했습니다.
7:49내레이터원효가 쓴 책은 중국 스님들도 즐겨 읽었습니다. 그리고 400여 년 뒤, 고려는 그를 나라의 스승, 국사로 올렸습니다.
7:58진행자계율을 깬 스님이, 나라의 스승이 된 겁니다.
8:19 · 제 생각
8:18진행자욱하고 나서 왜 늘 후회할까요. 제 답은 이렇습니다. 후회는, 두 번째 화살입니다.
8:26진행자석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. 누구나 첫 번째 화살은 맞는다. 그런데 보통 사람은, 거기에 두 번째 화살을 또 맞는다.
풀이 · 첫 번째 화살 = 피할 수 없는 아픔 · 두 번째 화살 = 거기 덧붙인 괴로움(욱한 말, 후회)
기록 · 요지 · 『상윳따 니까야』 36:6
8:36진행자석가가 말한 괴로움, 고는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습니다. 인생은 원래 뜻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이라는 거죠.
풀이 · 고(苦) = 두카(dukkha): 뜻대로 되지 않음, 불만족
8:47진행자그러니 첫 번째 화살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. 누구에게나 오는, 정상적인 일입니다.
8:54진행자출근길에 누가 확 끼어듭니다. 심장이 쿵 하죠. 여기까지가 첫 번째 화살입니다. 이건 누구도 못 피합니다.
9:01진행자그런데 경적을 울리고, 창문을 내리고, 그 사람 얼굴을 하루 종일 떠올립니다. 이건 우리가 스스로 쏜 두 번째, 세 번째 화살입니다. 그리고 밤에 누워서, 네 번째 화살까지 쏘죠.
9:15진행자스피노자도 『윤리학』에 이렇게 썼습니다. 후회하는 사람은, 두 번 비참하다.
기록 · 요지 · 『윤리학』 4부 정리 54
9:21진행자스피노자는 알았습니다. 원인을 모르면 끌려가고, 원인을 알아보면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을.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법이지요.
9:31진행자그런데 그 스피노자도, 1672년 그날 밤엔 욱했습니다. 그를 멈춘 건 철학책이 아니라, 잠긴 문 하나였습니다.
9:42진행자두 사람 모두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기에, 아마도 파문당한 철학자와 파계한 스님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.
9:49진행자화는 우리가 고르지 않습니다. 저절로 치밉니다. 하지만 치민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는, 우리가 고를 수 있습니다.
9:58진행자화가 치밀고, 말이 튀어나가기 직전. 거기에 아주 짧은 틈이 있습니다.
10:05진행자옛사람들은 아주 짧은 순간을 찰나라고 불렀습니다. 그 찰나에 멈추고, 숨 한 번 쉬면 됩니다.
10:12진행자이 틈을 붙잡고 곱씹으면 괴롭고, 틈이 없는 척하면 화에 끌려갑니다.
10:18진행자붙잡지도, 버리지도 말고, 그 틈에서 가볍게 노는 것. 그 찰나를 뛰어노는 것, 그게 자유의지입니다.
10:28진행자그렇다면 AI는 어떨까요. AI에게 화를 내 보신 적 있나요? 지금의 AI는 욱하지 않습니다. 오히려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고 하죠.
10:39진행자그럼 AI는 깨달은 걸까요? 석가는, 잘 배운 제자도 첫 번째 화살은 맞는다고 했습니다. 느끼고도 끌려가지 않는 것, 그게 깨달음입니다.
10:52진행자몸이 있다고 다 욱하는 것도 아닙니다. 로봇 청소기는 벽에 백 번 부딪혀도 욱하지 않죠. 욱하려면, 잃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. 살아 있어야 합니다.
11:01진행자그러니 욱하는 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. 욱한다는 건,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. 그리고 그 틈도, 살아 있는 우리에게만 있습니다.
11:12진행자화를 참기만 하라는 건 아닙니다. 부당한 일엔 화내야죠. 분노를 경계한 스피노자도, 그날은 화가 났습니다.
11:20진행자그럼 뛰어놀고 난 뒤의 뒷감당은 어떨까요?
11:23진행자철학으로 보면, 내 행동도 다음 일의 원인이 됩니다. 스피노자의 생각이죠.
11:29진행자역사로 보면, 원효는 계율을 깬 뒤 스스로 보통 사람이 되어 백성 곁에서 살았습니다.
11:35진행자과학으로 보면, 뇌는 결과를 보고 다음 선택을 고칩니다. 후회는 그 신호입니다.
11:42진행자뛰어논 자리에는 발자국이 남습니다. 그 발자국까지가, 뛰어논 사람의 몫입니다.
11:49진행자그러니 오늘 욱하는 순간이 오면, 아까 같이 해 본 숨 한 번만 천천히 내쉬어 보세요. 심장이 먼저 알아듣습니다.
12:18 · 마지막 질문과 저 언덕
12:18진행자마지막 질문입니다. 여러분이 오늘 피하고 싶은 두 번째 화살은, 무엇인가요?
12:28진행자욱하는 순간이 오면, 숨 한 번. 그 숨 한 번이, 여러분의 잠긴 문입니다.
12:34진행자화는 또 옵니다. 내일도, 모레도. 그때마다 숨 한 번. 첫 번째 화살은 맞더라도, 두 번째 화살은 쏘지 않는 겁니다.
12:45진행자옛사람들은 깨달음을, 강 건너 저 언덕이라고 불렀습니다. 원효도 그 언덕을 찾아 바다를 건너려 했죠.
12:53진행자그런데 답은, 해골 물을 마신 그 밤, 바로 그 순간에 있었습니다.
12:59내레이터가자, 가자, 건너가자. 모두 함께 건너가자. 깨달음이여, 기뻐하라.
13:10진행자저 언덕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. 두 번째 화살을 피할 때, 우리가 함께 건너가는,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습니다.